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조선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1894년 2월 15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또한 한산, 서천지역에서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우리고장 동학 농민전쟁의 진압과 그 후의 동학잔당의 보복 등에 대하여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동학 농민혁명(東學 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 革命), 동학 운동(東學 運動),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전쟁(東學 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 난(東學 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亂)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 농민혁명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 농민운동(甲午 農民運動), 갑오 농민전쟁(甲午 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 농민군
우리 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숭문동)에 8 문장가 중 시인 진택 신광하와 그 형제들이 살았다. 당대에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관계의 진출이 너무 늦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삶을 살아갔다 숭문동 시인 진택 신광하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숭문동(崇文洞)은 우리고장 화양면 활동리와 대등리의 옛 마을이름의 별칭이다.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가계는 6대조 참판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께서 한산이씨 목은 이색(李穡1328∽1396)선생의 후손인 이윤수(李允秀)공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인 활동리(은골, 어은동)에 정착 세거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장남 신담(申湛-호 어성-1519∽1595)은 충청도관찰사와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역임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첨추공 신호(申澔1687∽1767)의 첫째부인 성산이씨는 석북신광수(申光洙1712-1775)와 기록 신광연(신광연1715∽1778)을 낳으시고, 둘째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1729-1796)와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부용당신씨(申氏1732-1791)를 낳으셨다. 석북 신광수는 아들5명을 두었으나, 동생 신광연과 신광
우리 고장 건암서원에 풍옥헌 조수륜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이 배향되어 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고 있다. 풍옥헌과 창강 선생의 서원배향과정과 광해군의 폭정으로 희생된 풍옥헌 선생에 대한 훗날 인조반정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서원창건과 사액 우리 고장 문산면 지원리(鳴谷-명곡)에 명곡서원(鳴谷書院)이 있었다. 건암리로 이전하기 전에는 사액되지 못한 명곡서원은 현종 3년(1662년)에 사당의 형태로 창건되어 명곡 이산보(李山甫1539~1594)와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을 배향면서 1709년에 풍옥헌 조수륜과 창강 조속 부자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 후 문산면 건암리로 이건하고 1713년 10월 24일 사액서원(賜額書院-조정의 인가서원)인 건암서원(建巖書院)이 되었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현재까지 복설되지 못하였다. 2. 풍옥헌의 낙향의 생활 풍옥헌 조수륜(趙守倫)은 경기도 과천(果川)에서 태어났고 서천 문조향(文照鄕-서지골 현 문장교회 옆 서쪽 마을) 즉 문장리(화리) 마을에 낙향하여 5~6년간 살았다. 그곳에서 창강 조속(趙涑)을 낳았
충남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한실)에 400여 년 전에 대곡서당을 설치, 지역인재를 육성하였고 구한말 민종식이 홍주의병 창의로 봉기하였을 때 구암 구병대 선생께서 의병에 참여하고 군수품 조달에 앞장서며, 대곡서당을 제공하여 의병의 숙영지로서 역할을 제공하였던 대곡서당에 대하여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서천군 문산면 은곡리 마을회관에서 대곡(大谷-한실)마을 뒷산 450m 지점 원통산(遠通山) 중턱에 옛 대곡서당 자리에 1954년에 복원된 운포서당(雲圃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은곡리(한실)은 평해구씨 구맹전(丘孟傳)이 1506년 중종사화를 피해 서천으로 낙향 세거하면서 살았던 서천 평해구씨의 입향조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1507년(중종 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당시 어지러운 시기에 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정착하여 세거하여 하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이곳에 400여 년 전부터 설치 운영되었던 대곡서당(大谷書堂)이 각종 역사 자료에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곡서당의 설치와 운영과정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창건역사(創建歷史) 가. 창건자(創建者) : 양촌(陽村) 구희로(丘希
우리 고장 비인면 남당리 청절사에 송당 유홍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씨조선의 종계(宗系)의 역사가 명나라에 잘못 전달로 명나라 법전이 잘못되어 200여 년간 고쳐지지 않고 있어 조정에서 유홍을 사은사(謝恩使)로 삼아 종계변무를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광국일등공신에 책록된 유홍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비인면 남당리(통박골) 청절사(淸節祠)에 배향된 인물 중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일등공신인 유홍(俞泓)이 있다. 유홍은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와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우의정 등을 지냈다.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자는 지숙(止叔)이고, 호는 송당(松塘) 또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아버지는 생원 유관(兪綰)이며,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사복시(司僕寺) 정(正)으로 추증된 남충세(南忠世)의 딸이다. 비인 남당리 입향조(入鄕祖)인 중추부(中樞府) 첨지사(僉知事)유기창(兪起昌)의 증손자이고, 예조 판서(判書) 유여림(兪汝霖)의 손자이다. 유홍(俞泓)은 조부 경안공 유
옛 서천군의 진산은 천방산이다. 백제 때 서천군의 치소는 천방산 자락 문산면 신농리(왜멀)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처 조선시대에는 남산에서 금년도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서천읍 군사리에 500여년의 치소로 자리하여 왔다. 천방산이 남기 문화유산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고장 천방산은 서천군의 명산으로 백제시대 때 서천군(설림군-舌林郡)의 진산(鎭山)이었다. 진산이란? 난리를 진압하고 국가(고을)를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 고을의 주된 산을 진산이라 한다. 또는 진호(鎭護)라고 하였다. 진산을 배경으로 그 고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고을이 발전하면서 문화가 형성되며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을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문헌에는 천방사(千方寺)로, 현재는 천방사(千房寺)로 표기하고 있다.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 등 3개 면에 걸칠 만큼 산자락이 넓고 큰 서천 제일의 산이다.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 있고 동·남·북 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구한말 천민인 백정의 신분이 철폐되고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 일제강점기가 되었어도 여전히 백정에 대하여는 차별하는 사회가 지속되었다 1923년도부터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우리 고장 서천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서천에서 일어났던 형평운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형평운동의 배경 형평운동(衡平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25일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진주의 본사를 중심으로 각 도에 지사를, 각 군에 분사(分社)를 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성하였다. 형평(衡平)이라고 한 것은 ‘형(衡)’이라는 글자가 저울을 뜻하는 것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저울과 같이 공평한 사회를 만들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했던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형평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지만, 내부 분열과 일제의 압력으로 10여
1894년 한산지역에서도 동학이 크게 일어 한산읍성이 점령하였으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동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이 천주교 등의 종교집단에 투탁하여 그들은 종교를 이용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변혁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투탁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자폐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5.교민의 자폐 뮈텔주교와 담판 1) 외무대신과 법부대신 협의 1895년 8월 6일 자로 외부대신은 법부대신과의 자폐 사건에 대한 협의를 거치면서 한산지역 교민의 자폐를 비롯하여 최근 인근지역 5~6개 지역도 같은 사례가 보고된 바 있어 이미 프랑스공사관에도 통보하였다고 회신했다. 조선교구 뮈텔주교와 담판하여 각처의 선교사에게 신칙하고, 교민을 비호하고 관청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으니 각 읍에 지시하여 서학을 빙자하여 처벌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교민은 처벌하여 자폐를 막도록 회신하였다. 2) 법부대신의 한산군수에 대한 지시 한산군에 갇혀 있는 김선재(金善在)와 서가량(徐可良)의 죄상을 다시 조사한 보고서를 접수한즉 “지난번 보고에는 효수하여 경계함이 옳다하였다” “하지만, 이번의 보고에는 용서
1894년 한산지역에서도 동학이 크게 일어 한산읍성이 점령하였으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동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이 천주교 등의 종교집단에 투탁하여 그들은 종교를 이용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변혁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투탁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자폐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지리적 환경 서천군은 당시 동쪽으로 한산군, 중앙에 서천군, 서쪽으로 비인군으로 나누어져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갖추었던 지역이다. 한산군의 교통과 경제적 활동은 금강을 끼고 전북지역과의 교통은 3개의 금강나루(신성,죽산,와초)를 이용하여 왕래하면서 인적교류가 이루어져 전봉준이 이끄는 전북지역의 남접동학의 영향을 끼쳤다. 남접동학으로부터 한산지역 동학도의 조직임명장은 알 수 없지만 한산군 관할지역인 신성나루(웅포나루: 일명 곰개나루)를 선택하여 건너왔다. 2. 조직과 관아 점령 당시 한산지역의 동학에 대한 한산면 야인리에 거주면서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 동학농민전쟁의 활동내용의 최덕기(崔德基) 일기인 ‘甲午記事’를 보면, 한산지역의 동학농민 전쟁은 독자적인 전쟁보다는 전쟁이전에 기 조직된 접주들이 전북지역